7번 포스트까지로 다가오는 경제위기에 대한 경보를 아쉬운 대로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몇 가지 주제(기축통화, 환율, 진짜 돈, 식량위기)를 추가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미 해 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완전한 경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우선 기축통화부터 다루겠습니다.
아시다시피 2차대전 이후로 세계의 기축통화는 미국 달러입니다.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는 매우 큰 혜택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이 서로 거래를 할 때 미국 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미국은 달러를 엄청나게 수출할 수 있습니다. “달러를 엄청나게 수출한다”는 말을 잘 새겨 보세요. 저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미국 달러는 진짜 돈이 아니고 통화(currency)입니다.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는 것이죠.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면 세상 모든 나라들이 석유나 광물자원, 각종 제조품, 서비스를 미국에 가져다 주고 대신 저렇게 찍어낸 종이조각을 소중히 받아 가방에 잘 챙겨넣고는 꼭 붙들고 돌아갑니다. 봉이 김선달도 이런 장사는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받아간 미국 달러를 또 세상 모든 나라들은 자기네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 둡니다. 미국 달러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으면 한국이 98년에 당했던 외환위기 같은 봉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소위 양털깍기가 일어나서 알짜배기 기업과 서울 강남의 노른자 부동산이 헐값에 외국인들에게 다 넘어가지요. 바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각자 애써 수출한 댓가로 받아 온 달러라는 종이조각을 외환보유고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아두는 겁니다. (혹시 안 보신 분은 ‘국가부도’라는 영화를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주로는 미국 국채의 형태로요. (이것이 몇 달 전부터 미국 국채금리가 급상승하고 따라서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이자 등도 급상승하고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미국 바깥으로 내보낸 달러를 유로달러(Eurodollar)라고 부릅니다. 명칭이 맘에 들지 않지만 아무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유로달러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요? 엄청나겠지요. 그런데 그 액수만큼은 미국은 국부를 공짜로 불린 겁니다. 도둑질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강도짓도 아니고요. 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거래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좋게 이름을 붙여도 이건 마술이고 좀 더 심술궂게 이름을 붙이자면 사기입니다. 매우 가치있는 일차산업 자원과 노동력의 댓가로 아무 가치 없는(not backed by gold, backed by nothing) 종이조각을 넘겨주니까요.
기축통화의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국가나 개인은 숫제 미국달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몰수해 버리기도 하고요. 지금 이란, 북한, 러시아 등이 그런 처지에 있지요. 이건 그 나라 경제를 파탄시켜버릴 수 있는 강력한 조치입니다. 물론 군사력의 뒷받침도 있지만요.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혜택이 있는 기축통화라는 지위를 미국 달러가 조금씩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압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이미 설명드린 것처럼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통화를 엄청나게 찍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인플레이션). 그건 달러 가치의 하락을 의미합니다. 내가 어떤 은행에 저축을 해 두었는데 그 은행이 마음대로 그 저축액을 자꾸 줄여버린다면 나는 계속 그 은행에 저축을 해야 할까요? 그건 바보짓이죠.
예컨대 중국이 원자재를 수입해서 자기네 나라의 노동력과 기술을 이용해서 핸드폰을 생산해서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핸드폰을 미국에 넘겨준 댓가로 미국 달러를 받아서 돌아옵니다. 그걸 외환보유고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외환보유액이 자꾸 올라가니 중국 정부는 기분이 좋습니다. 국부가 증가하는 것 같고 중국이 강성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럽쇼! 알고보니 미국이 밤낮 윤전기를 계속 돌려서 달러를 엄청나게 찍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은 그 동안 벌어놓은 달러로 석유 같은 것을 수입하려고 하니까 석유값이 자꾸 오르는 겁니다. 헐, 그럼 뭐죠? 중국은 헛고생하는 겁니다. 점점 가치(구매력)가 떨어지는 달러를 맨날 받아다 쌓아두어 봤자 미국 좋은 일만 하는 셈이죠.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정책을 바꾸어서 미국 국채를 쌓아놓는 것을 줄이기 시작합니다. 실용적인 이유로 중단할 수는 없고요. 미국에 엄청난 양의 공산품을 수출하고 그 대금을 다 달러로 받아오니 중국의 외환보유고 액수는 어마어마합니다만, 중국은 그 달러 비중을 조금씩 줄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위에서 중국은 제가 예로 든 것뿐이고,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달러 보유고를 줄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공산품을 수출하는 중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주로 커머디티(석유와 천연가스, 농축 우라늄, 밀 등)를 수출하는데, 그 댓가로 받아오는 미국 달러의 효용과 가치에 의문을 품게 된 러시아는 미국 달러를 내다 팔고 대신 금을 꾸준히 사 모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이 줄어들고 그 결과 미국이 얻는 혜택도 축소되고 있는 것이죠.
단기적인 이유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해버렸습니다. 외국은행에 있던 달러는 몰수해버리고요. 전쟁이 누구 책임이고, 누가 옳고 그른지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미국이 러시아의 국부를 몰수하고 러시아가 (이미 규모를 상당히 줄여 놓긴 했지만) 저축해 둔 미국 달러를 일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행동은 세계 많은 나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미국에 밉보이면 자기네도 언제든지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BRICs(Brazil, Russia, India and China)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금융결제시스템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것이 실현되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는 더욱 흔들리겠지요.
위와 같은 장단기적 이유 때문에 국제 결제에서 미국 달러의 사용 비중도, 유로달러의 규모도 그동안 계속 떨어져 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결과, 세계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의 지위는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